진짜 자유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두려운 말일 수 있지만, 박열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것이 구체적인 얼굴을 갖는다. 영화 ‘박열(2017)’은 이름조차 낯선 조선 청년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로 일제의 권위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실화를 담고 있으며, 당시 일본 사회의 지배 질서와 그를 전복하려 한 사상적 흐름을 진지하게 조명한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매우 드문 정치 영화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고뇌와 신념이 겹쳐진 정밀한 감정 드라마이기도 하다.
시대의 민낯을 마주한 젊은 저항자
‘박열’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단순히 실존 인물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직면한 시대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고, 민족적 정체성이 억압되던 시절, 박열은 천황을 모욕하며 아나키즘을 외쳤고, 그로 인해 일본 당국에 체포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의 고집과 말투, 그리고 정서적 깊이까지도 세밀하게 다루며 한 사람의 삶을 완성된 인격으로 제시한다. 특히 간토대지진이라는 역사적 사건 이후 퍼진 조선인 학살과 이를 덮기 위한 일본 정부의 전략 속에서 박열이 어떤 방식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은 매우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이 장면들은 단지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 처한 정치적 프레임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설명이며, 일본 내부에서조차 박열을 대하는 시선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반항아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무장한 정치적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영화가 그를 신격화하지 않고,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 점이 영화가 설교가 아닌 감동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가네코 후미코, 인간 존엄을 외치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다. 일본인 여성으로서 조선인 남성과 함께 일제 권력에 저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후미코는 그저 옆에서 지지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독립적인 사상을 가진 주체적 인물로, 오히려 박열보다 더 날카롭게 시대를 비판한다. 특히 그녀가 법정에서 일본 황실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폭로하며 인간의 존엄을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로 남는다. 후미코는 자신의 출신과 국적을 넘어서는 철학적 감수성을 지녔고, 단지 연인이라기보다는 동지로서 박열과 함께 체제에 도전했다. 그들의 관계는 영화 내내 ‘로맨스’보다 ‘연대’로 읽히며, 이는 요즘 시대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후미코는 자유의 가치를 단순히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린 시절, 성장 배경, 가족과의 갈등까지도 드러나며, 이 인물이 단지 박열의 부속이 아니라 자신만의 결기로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영화는 후미코를 통해 “일본 안에서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어떤 위험과 대가를 요구했는지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박열과 후미코는 함께 싸우되, 각각의 이유와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진짜 ‘자유로운 인간들’이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오늘날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박열과 후미코가 남긴 사상의 흔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국가란 무엇이고, 권력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며, 개인은 그것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거나, 정치적 신념이 탄압받는 시대에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더욱 뼈아프다. 박열이 일본 황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단순한 과격함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허상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신념은 삶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였고, 말과 행동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후미코 역시 언어의 힘을 믿었고, 그것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영화는 이러한 두 사람의 철학과 행동이 어떻게 시대를 흔들었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도 시청자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박열과 후미코의 선택을 보여주며 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떤 신념을 살아내고 있는가. 그 질문은 간단하지만 무겁고,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박열’은 역사극을 넘어 오늘날의 현실에도 깊이 스며드는 철학적 텍스트이며, 행동하는 지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기도 하다. 모든 장면과 대사는 생생하게 구성되었고, 실제 법정 기록을 기반으로 한 대사 구성은 리얼리티와 드라마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췄다. 배우 이제훈과 최희서는 단순한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 인물을 생생하게 재현해냄으로써 그들의 고뇌와 위엄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감독 이준익은 이 영화를 통해 ‘역사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나와 너의 문제’라는 주제를 조용히 강조한다. 그렇게 ‘박열’은 한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며, 단지 관람을 넘은 성찰의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