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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날갯짓이 남긴 울림 – 영화 『벌새』(2019) 리뷰

by 머니소낙비 2025. 4. 22.

 

2019년 개봉한 영화 『벌새』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잔잔한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사춘기를 겪는 한 소녀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세상이 요구하는 어른스러움과 실제로 느끼는 감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은희’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감독 김보라는 이 작품을 통해 일상의 틈 사이로 드러나는 감정의 결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관객에게 “당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죠?”라고 묻는 듯한 깊은 공감을 전합니다.

복잡한 가족 속, 누구도 몰랐던 은희의 세계

영화는 중학생 은희의 시선을 따라가며 진행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서울의 가정이지만, 은희에게는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성적과 비교 속에서 소외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삐걱거리며, 가족 안에서는 늘 뒷전입니다. 특히 폭력적인 오빠와 무관심한 부모 사이에서, 은희는 마치 작은 벌새처럼 조용히 날개를 퍼덕이며 외로움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은희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갑니다. 학교 수업, 병원 진료, 친구와의 다툼 등 모두 평범한 사건들이지만, 은희의 눈과 감정은 이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합니다. 특히 부모의 말보다 친구의 한마디, 형식적인 교육보다 영지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가려는 은희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놓치고 있는 '아이의 세계'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교실이 아닌 곳에서 배운 삶의 진실

영화 『벌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 중 하나는 은희의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입니다. 그녀는 은희에게 처음으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입니다. 상처받았을 때 안아주고, 말이 막혔을 때 기다려주며, 삶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고민해주는 존재죠. 영지는 교과서가 아닌 삶 자체를 가르쳐주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은희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감정을 느끼고, 그로 인해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은희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는 단지 ‘성장’이라는 말로 치환되기엔 너무나도 복합적인 감정이며, 그 미묘함을 『벌새』는 아주 섬세하게 포착해냅니다.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 왜 어른들도 공감할까?

『벌새』가 특별한 이유는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이면서도,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느꼈던 외로움, 억울함, 그리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답답함이 은희의 눈과 표정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은희는 자신을 향한 무관심을 견디며, 그 안에서도 자신을 지키려는 작은 몸짓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생존 방식이었고,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어린 나’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그 잊혀진 감정을 다시 꺼내보게 하며, 그 시절을 이해하고 위로하게 만듭니다.

또한 영화는 한국 사회의 가족 구조, 교육 환경, 계급 문제 등을 은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당시의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건은 직접적인 서사가 아니지만, 배경으로 자리함으로써 은희가 살아가는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암시합니다.

『벌새』가 남긴 메시지 –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날갯짓에게

감독 김보라는 『벌새』를 통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은희의 조용한 날갯짓은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큰 사건, 드라마틱한 변화에만 주목하지만, 『벌새』는 일상의 틈 사이에 숨겨진 감정과 성장의 순간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쳐온 수많은 은희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어른이 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조용히 되새기게 만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은희’들이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벌새』는 그 모든 날갯짓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영화입니다.

결론: 성장의 기록, 그 누구의 삶도 작지 않다

『벌새』는 단순한 성장영화가 아닙니다. 한 개인의 성장 과정을 통해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감정의 깊이와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는 작품입니다. 조용히 흐르지만 강하게 울리는 이 영화는, 우리가 지나온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울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은희가 보여준 ‘작은 날갯짓’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심 때문일 것입니다. 『벌새』는 모든 세대가 함께 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한국 영화의 보석 같은 작품입니다.

벌새 소녀 날갯짓 남긴 울림